
미국에서 “간호사로 일한다”는 말을 들으면 많은 분들이 자동으로 RN을 떠올리지만, 현장에서는 RN(Registered Nurse), LPN/LVN(Licensed Practical/Vocational Nurse), CNA(Certified Nursing Assistant)가 한 팀으로 돌아가며 서로 다른 역할을 맡습니다. 문제는 이 차이가 단순히 “학력이 높다/낮다” 정도가 아니라, 환자 안전과 법적 책임을 좌우하는 ‘업무 범위(Scope of Practice)’로 이어진다는 점입니다. 어떤 일은 RN만 할 수 있고, 어떤 일은 LPN이 할 수 있지만 RN의 감독이 필요하며, CNA는 간호사의 지시에 따라 수행할 수 있는 돌봄 중심 업무가 정해져 있습니다. 특히 이민 간호사로 미국에 오면, 한국에서 익숙했던 “다 같이 뛰어들어 처리하는 방식”이 통하지 않는 순간이 생기기 쉽습니다. 왜냐하면 미국은 면허 종류별로 가능한 행위가 명확히 구분되고, ‘누가 무엇을 맡았는지’가 차팅과 책임 구조에 그대로 남기 때문입니다. 이 글에서는 RN·LPN·CNA의 자격 요건부터 현장에서 실제로 하는 일, 그리고 가장 자주 혼동되는 경계선(투약, IV, 사정, 차팅, 위임과 감독)을 사례처럼 풀어 정리합니다. 결국 목표는 하나입니다. “팀으로 더 안전하게 일하기 위해, 내 역할을 정확히 알고 서로를 존중하는 것.” 그 감각을 잡아두면, 첫 직장 적응 속도가 눈에 띄게 빨라집니다.
서론: 왜 RN·LPN·CNA 구분이 미국에서는 더 중요할까
미국 의료 현장을 처음 접하면 가장 먼저 느끼는 게 있습니다. “사람이 정말 많다”는 것과 “역할이 정말 촘촘히 나뉘어 있다”는 점입니다. 한국에서는 간호사라는 하나의 직군 안에서 업무가 넓게 퍼져 있고, 병원 문화에 따라 ‘원래 이건 누가 한다’가 암묵적으로 굳어져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미국에서는 면허가 곧 업무의 울타리입니다. RN, LPN, CNA는 같은 유니폼을 입고 같은 병동에 있어도, 법과 규정이 허용하는 범위가 다르고 그 차이가 생각보다 큽니다. 그래서 현장에서는 “누가 할 수 있냐”만큼이나 “누가 책임질 거냐”가 늘 따라다닙니다.
RN은 환자 상태를 종합적으로 사정하고(assessment), 간호 판단을 내리고, 우선순위를 결정하며, 계획을 세우고, 다른 직군과 조율하는 중심축 역할을 합니다. 반면 LPN은 상대적으로 ‘안정된 상태의 환자’를 대상으로 기본 간호와 처치, 투약 등을 수행하되 많은 경우 RN 또는 의사의 감독/지시에 따라 움직입니다. CNA는 돌봄과 일상생활 보조(ADL: 식사, 세면, 이동, 배변, 체위변경 등)에 집중하며 활력징후 측정, 기본 관찰을 통해 “이상 신호를 빨리 발견해 RN/LPN에게 보고하는 눈”이 됩니다. 세 직군이 계단처럼 연결되어 팀을 이루는 구조라고 보면 이해가 빠릅니다.
특히 이민 간호사에게 중요한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 ‘내가 할 수 있는 일’과 ‘하면 안 되는 일’의 경계를 정확히 아는 것이 안전과 직결됩니다. 예를 들어, 급성기 병동에서 IV push 약물, 혈액제제, 초기 사정과 간호진단, 퇴원교육의 최종 책임 같은 부분은 대개 RN의 영역으로 묶입니다. 둘째, 위임(Delegation)과 감독(Supervision) 문화가 매우 강합니다. RN이 CNA에게 업무를 맡길 때는 “그 일이 위임 가능한가, 환자가 안정적인가, 결과를 어떻게 확인할 건가”를 생각해야 하고, CNA는 “내가 관찰한 변화(예: 갑자기 식은땀, 호흡수 증가, 혼미, 소변량 감소)를 즉시 보고”하는 역할을 수행합니다. 이 흐름이 매끄럽게 돌아가면 병동이 편해지고, 흐트러지면 환자도 직원도 위험해집니다.
마지막으로 꼭 기억해야 할 문장이 하나 있습니다. 미국에서 RN·LPN·CNA의 역할은 주(State) 법과 각 기관 정책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점입니다. 같은 직군이라도 병원, 요양시설(LTC), 재활, 홈케어, 클리닉에 따라 허용 범위가 달라지고, “우리 병원에서는 이렇게 한다”는 정책이 법보다 더 엄격한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 글은 큰 틀의 표준적인 차이를 설명하되, 실제 근무에서는 반드시 해당 주 Board of Nursing과 기관의 policy를 확인해야 한다는 전제를 깔고 읽어주시면 좋겠습니다.
본론: RN·LPN·CNA의 자격, 업무, 책임의 ‘경계선’ 정리
먼저 자격과 교육부터 짚고 갈게요. RN은 보통 ADN(2년제) 또는 BSN(4년제) 과정을 마치고 NCLEX-RN을 통과해 주 면허를 받습니다. LPN(LVN)은 1년 안팎의 practical/vocational nursing program을 수료하고 NCLEX-PN을 통과합니다. CNA는 비교적 짧은 교육(주별로 시간 기준이 다름)과 실습을 거쳐 자격시험을 통과한 뒤 주의 registry에 등록되는 구조가 흔합니다. 즉, RN은 ‘간호 판단과 총괄’을 위해 더 길고 깊은 교육을 받고, LPN은 ‘기본 간호와 안정 환자 중심의 실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훈련되며, CNA는 ‘환자의 일상 기능과 기본 관찰’을 안전하게 수행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그럼 실제 업무는 어떻게 갈릴까요? 핵심 키워드는 RN은 “Assessment/Plan/Delegation”, LPN은 “Implementation(수행)”, CNA는 “ADL/Observation(돌봄·관찰)”입니다. RN은 환자를 처음 받았을 때 초기 사정(호흡, 순환, 통증, 신경학적 상태, 피부/상처, 낙상 위험, 약물 알레르기 등)을 종합적으로 하고, 그 결과를 바탕으로 간호진단과 계획을 세우며, 환자 상태 변화에 대한 임상 판단(예: 급격한 호흡곤란, 흉통, 의식 변화, 쇼크 징후)을 통해 의사 호출·Rapid Response 같은 대응을 리드합니다. 또한 퇴원교육, 환자·가족과의 교육 및 의사소통에서 최종 책임을 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LPN은 투약(경구, 피하, 근육주사 등), 상처 드레싱, 기본 처치, 활력징후 확인, 환자 교육의 일부(기관 정책에 따라) 등을 수행할 수 있습니다. 다만 “새로 문제를 규명하는 수준의 사정”이나 “간호진단·계획 수립의 최종 책임”은 RN 영역으로 남는 경우가 흔합니다. 또 IV 관련 업무는 주별로 차이가 큽니다. 어떤 주/기관에서는 LPN이 IV 삽입이나 IV 약물 투여의 일부를 할 수 있지만, 어떤 곳에서는 제한이 많고, 특히 IV push, 고위험 약물(예: 일부 혈관작용약), 혈액제제 투여/이상반응 대응은 RN로 제한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요점은 LPN이 ‘못 한다’가 아니라, “할 수 있어도 조건과 제한(감독, 교육 이수, 정책)이 붙는다”는 것입니다.
CNA의 역할은 환자 곁에서 가장 오래 머무는 사람이라는 점에서 굉장히 중요합니다. 식사 보조, 체위 변경, 침상 목욕, 이동/보행 보조, 배변·배뇨 보조, 낙상 예방, 기본 활력징후 측정, 입력/출력(I&O) 기록 같은 업무가 대표적입니다. 여기서 CNA의 실력은 단순히 ‘손이 빠르다’로 끝나지 않습니다. “어제와 다른 점을 알아채는 관찰력”이 핵심입니다. 예를 들어 활력징후가 평소보다 올라가거나, 갑자기 식욕이 떨어지거나, 소변량이 눈에 띄게 줄거나, 피부가 창백하고 축축해지는 것 같은 변화는 CNA가 먼저 발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때 중요한 건 판단을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즉시 보고하는 것입니다. “이상하다”를 빨리 올려주는 CNA는 병동을 살립니다.
많이 헷갈리는 경계선도 정리해볼게요. 첫째, ‘사정(Assessment)’입니다. RN 사정은 단순히 활력징후를 재는 것이 아니라, 그 데이터를 해석해 의미를 만들고 우선순위를 결정하는 과정입니다. LPN도 관찰하고 자료를 수집하지만, 급성 변화의 임상 판단과 간호계획의 수정 책임은 RN이 맡는 구조가 흔합니다. 둘째, ‘투약과 고위험 약물’입니다. 경구약, 인슐린 같은 피하주사, 예방접종 형태의 근육주사는 LPN이 수행하는 시설이 많지만, 고위험 IV 약물/혈액제제/진정 관련 약물은 RN 제한이 흔합니다(정확한 범위는 주·기관마다 다름). 셋째, ‘차팅(Documentation)’입니다. CNA는 자신이 수행한 ADL과 측정값을 기록하고, LPN은 수행한 간호와 투약 기록을 남기며, RN은 환자 상태 평가, 간호진단/계획, 교육, 의사소통, 변화 대응의 핵심을 차트에 남기는 책임을 집니다. 그리고 문제가 생겼을 때 가장 강하게 “왜 그렇게 판단했는가”를 질문받는 건 대개 RN입니다.
마지막으로 ‘위임(Delegation)’을 현실적으로 말해보면, RN이 CNA에게 “활력징후 좀 재주세요”라고 말하는 순간에도 사실 체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환자가 안정적인지, 측정이 어려운 상황은 아닌지, 결과를 언제·어떻게 보고받을지 말이죠. CNA는 결과를 전달할 때 “정상/비정상”을 단정하기보다 구체적인 숫자와 변화, 그리고 눈으로 본 상태(예: 숨이 가쁘고 말을 끊어서 한다)를 함께 공유하는 것이 좋습니다. 이렇게 팀이 서로의 역할을 정확히 이해하면, ‘내가 왜 이걸 해야 하지?’라는 불만이 줄고, 대신 “내가 잘하면 팀 전체가 편해진다”는 감각이 생깁니다. 그게 미국식 팀 간호의 진짜 장점이기도 합니다.
결론: 내 역할을 아는 것이 곧 ‘안전’이고, 결국 커리어가 된다
RN, LPN, CNA의 차이를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책임의 무게가 다르고, 그 무게는 법과 정책으로 고정되어 있다”입니다. RN은 환자 케어의 중심에서 사정하고 판단하고 계획을 세우며, 위임과 조율을 통해 팀이 움직이게 만드는 사람입니다. LPN은 안정된 환자 중심으로 투약과 처치 등 실무를 탄탄하게 수행해 병동의 흐름을 받쳐주는 역할을 하고, CNA는 환자 곁에서 돌봄과 관찰로 ‘변화의 첫 신호’를 발견해 팀이 빠르게 대응할 수 있게 돕습니다. 어느 하나가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한 구조가 아니라, 서로가 서로의 빈자리를 메워야 병동이 안전하게 굴러갑니다.
미국 이민 간호사 입장에서 이 구분을 제대로 이해하면 얻는 이점이 꽤 큽니다. 첫째, 불필요한 스트레스가 줄어듭니다. “왜 나는 이것까지 해야 하지?” 대신 “이건 내가 책임져야 하는 영역이구나”와 “이건 위임하고 결과를 확인하면 되는 일이구나”가 선명해지면, 머릿속이 훨씬 정돈됩니다. 둘째, 팀 내 신뢰가 빨리 쌓입니다. RN이 CNA의 관찰을 존중하고, CNA가 RN의 우선순위를 이해하며, LPN이 자신의 수행을 정확히 차팅하고 보고하면, 그 팀은 자연스럽게 단단해집니다. 현장에서 ‘일 잘하는 사람’은 결국 혼자 다 하는 사람이 아니라, 역할을 정확히 수행하고 소통으로 연결하는 사람입니다.
셋째, 법적 리스크 관리에 도움이 됩니다. 미국은 차트가 곧 기록이고 기록이 곧 책임입니다. 특히 RN은 “왜 그렇게 판단했고, 무엇을 확인했고, 누구에게 보고했고, 어떤 교육을 했는지”가 문서로 남아야 합니다. 이 감각을 처음부터 잡아두면, 나중에 이직이나 승진, 전문부서 지원에서도 훨씬 유리해집니다. 반대로 경계를 흐리게 일하면 그 순간에는 편해 보여도, 사고가 났을 때 가장 크게 흔들릴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현실적인 팁을 드리면, 첫 직장에 들어가면 orientation 기간 동안 꼭 세 가지를 체크하세요. 1) 우리 기관에서 LPN이 할 수 있는 IV 관련 업무 범위, 2) CNA에게 위임 가능한 업무 리스트와 보고 기준(예: 활력징후 어떤 수치 이상이면 즉시 보고), 3) RN의 필수 차팅 항목과 교육/퇴원 절차입니다. 이 세 가지만 정확히 알아도 “초반 적응 난이도”가 확 내려갑니다. 결국 RN·LPN·CNA의 차이를 이해하는 일은 단순한 직종 비교가 아니라, 미국 의료 시스템에서 안전하게 살아남는 기본기입니다. 그리고 그 기본기는 시간이 지나면 ‘커리어의 속도’로 이어집니다.